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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depression(3)

우리 시어머니가 발굴하고 띄우고 평생 친구였던 디자이너가 일본 여인이거든. 돌아가신 분을 한 순간 인종차별주의로 매도하는 바람에 그날 시누는 처음으로 남편한테 뺨을 맞았어. 그때도 정말 혼란스러웠는데... 그떄 시누 남편(이름 대면 다 아는 유명한 스페인 음악가야)이 멀뚱하게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어. 시누가 발악을 하면서 넌 내가 맞았는데 그냥 보고만 있냐고 하니가 그 남편이... "넌 좀 맞을 만 했어." 라고 하더라고. 2년 후 그 부부 이혼했어. 그리고 그날 만남 이후 우리와 그 여자는 전혀 연락을 안하고 살았어. 작년 시아버지 소송건 까지는... 그래, 그 이야기 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우리 시어머니는 이혼하자마자 진짜 많은 남자들에게서 대쉬를 받았어. 저명한 언론인, 배우, 아티스트, 작가... 그녀는 자기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고 거절했어. 나는 이제 엄마일 뿐이라고...


그렇게 시부모는 소송으로 2년에 걸친 지리한 이혼싸움을 했어. 제일 씁쓸한 부분은 그 미친 시부는 양육권은 입에도 안 올렸다는 거야. 아주 당연한듯 시어머니가 둘을 다 키우는 거였고 시어머니는 싸움 끝에 원랬던 수준의 양육비와 니스 집을 가져왔어. 나중이 이 니스집은 남편에게 물려주셨어. 그 니스집은 가족이었을때 매년 여름마다 지내던 곳이었는데 시부는 그런 추억이 깃든 곳을 넘길 수 없다는 개소리를 했대. 그리고 새로 생긴 두 딸을 키우는데 돈이 많이 든다는 뒷목잡을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아 그리고 또 하나 더 절대 상식선에서 이해 안 가는 것은 이혼소송중 프랑스 방문시에 동거녀인 그 비서와 딸들도 데리고 왔다는 거야. 그리고 큰 딸은 우리 시어머니를 법정에서 보게 된 날 이런 소리를 했대. "아빠, 마리나는 우리 엄마보다 훨씬 예뻐. 너무 세련되었어. 나 마리나 딸 할래." 뻔뻔함도 유전이 되는 건가 봄. 


부모가 이혼한 후 아들들은 오랫동안 친부와 연락하지 않았어. 그리고 친부도 굳이 애써 연락하지 않았대. 인간 같지 않은 시누는 뻐꾸기 여사가 데리고 갔어. 아! 그 뻐꾸기 여사가 데리러 온 날 마지막으로 우리 시어머니한테 한 말 역시 기똥참. "어차피 이혼할 줄 알았어. 그 인간은 평생 그럴 인간이야. 그나저나 얘(시누)를 어떻게 보내려고 해. 정들어서... 계속 데리고 있고 싶대도 난 이해해."우리 시어머니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아주 우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줬대."개소리말고 니 딸 데리고 썩 꺼지렴"그 모녀가 짐을 뺴는 동안 동시에 우리 시어머니가 고용한 청소 전문 아줌마 둘이 일사불란하게 방을 갈아 엎듯 청소하는 중이었음.시동생은 이후로 단 한번도 시부를 '아빠'라 부른 적 없고 마주쳐야 할 때는 이름을 불렀어. 시부는 파리에 있던 에이전시는 대리인을 써서 경영하고 이후 산타모니카에 눌러 앉았어. 그 바람난 비서년과는 아주 허무하게 헤어지게 돼.


세상에는 이해가 안 가는 것들이 많이 있잖아? 그 중 하나가 이거야. 바람을 피는 남자의 상대를 알고보면 많은 경우 본처보다 못해. 굳이 예를 안 들어도 유명인 중에도 많으니 동의하지? 그 비서는 정말 여장남자 같이 생겼어. 180이 넘는 키에 덩치도 있어서 매력이라곤 없는 데다 옷도 히피스럽게 입는 70년대 백인 트레일러 스타일. 우리 시어머니와 완전 정반대야. 애를 둘이나 낳고 같이 살았으니까 당연히 그 여자는 결혼을 원했어. 우리는 언제 결혼을 하나요? 이혼도 이제 정리 되었고... 라고 그여자가 물었을때 절대 정상인이 아닌 미친 시부는 화들짝 놀래면서 대답했어. 내가 언제 결혼한댔어, 너랑? 당연히 여자는 돌고, 그 길로 시아버지를 떠남. 하지만 여기도 뻐꾸기. 딸 둘은 시아버지한테 독박으로 떠 넘기고 감. 그래서 이 미친 남자는 지 아들 둘은 버리고 따로 얻은 어린 딸 둘을 키우게 되었어. 그즈음 슬금슬금 그는 다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가끔 걸기 시작해. 


시어머니는 남자들을 다 거절하고 엄마로만 살고자 했지만 모든 것은 운명이야. 아름다운 여자는 혼자 있는 팔자가 어려운 건지도 몰라. 결국 그녀는 한 남자의 정성에 넘어가게 돼. 그 사람은 스위스 방송국 회장이었어. (이 영화같은 스토리는 이미 내 책 라 비타 에 벨라로 나와 있어. 읽은 친구들은 다 아는 내용이니 그들의 로맨스는 넘어갈게. 지면책은 두 번에 걸쳐 완판 되고 이북은 가능해. 궁금한 사람들은 나한테 물어줘) 그는 매주 스위스에서 파리까지 시어머니를 만나러 왔고 털이 죄다 빠져 쓰러져가던 새 같은 시어머니를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어. 그리고 세 번의 거절 끝에 그녀는 결국 그의 청혼을 받아들었어. 그렇게 새가족이 된 넷은 스위스 루가노에서 살게 돼. 남편과 시동생은 이태리 국경에 있는 국제학교를 다녔어. 그는 우리 시어머니에게 루가노의 집을 선물로 줬는데 시어머니는 그 집을 미리 아들들 공동 유산으로 명시해뒀어. 


새아버지는 친부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분이었어. 두 아들들을 친자식처럼 대했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어. 남편과 시동생 모두 첫 차가 벤츠 컨버터블이야. 학비도 엄청 비싼 국제학교도 보내주고 그렇게 부자인데도 자주 직접 요리를 해주곤 했대. 그런데... 새아버지를 둘 다 존경했지만 우리 시동생은 원래도 마마보이였는데 엄마가 배신 당하고 이혼하는 걸 보는 과정에서 조금 지나칠 정도로 엄마에게 더 애착을 보이게 돼. 어떤 여자를 만나도 엄마와 비교하다가 금세 질렸고,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 만큼 옆에 새로 생긴 새아버지도 좋아지진 않았나봐. 내 남편은... 시간이 지나자 친부도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대. 당연히 욕 먹어 마땅한 아빠지만 그는 어렸을때 시아버지와 단 둘이 캠핑을 갔던 기억이나 처음 카메라를 쥐어주고 사진을 가르쳐주던 것, 아빠의 촬영을 따라다니며 도왔던 것 이런 추억들이 나쁜 기억을 자꾸만 희석시켰나봐.


그렇지만 그는 그런 속내를 엄마나 동생에겐 요만큼도 꺼낼 수 없었어. 그러는 순간 대역죄인, 배신자가 되니까. 그런데 그 마음을 읽어낸게 새아버지야. 어느날 그는 시어머니에게 대신 말을 꺼내서 설득해주고 여행준비를 다 해주면서 방학에 산타모니카에 다녀오라 했어. 명목은 시아버지 회사에서 한 달간 일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 남편은 이때 이야기를 딱 한 번 내게 한 적이 있어. 나는 작년에 발발한 우울증 고름 중 이 일이 분명 크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들뜬 목소리로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고 전화를 했을 때 시아버지의 대답은 그거였어. 미국시간으로 지금이 몇 시인지 아느냐. 왜 오밤중에 예의 없이 불쑥 전화를 하느냐. 그때 때려치고 가지 말았어야겠지만 그는 또 그럴 수 있다고 좋게 생각하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 당연히 공항에 마중나와 있지도 않았어. 유럽에서 혼자 벗어나 본 적 없던 십대 아들이 았는데도... 그것도 몇 년이나 못 만난... 전화를 하니 알아서 오라 했대.시아버지는 남편이 오는 날짜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 남편은 혼자서 산타모니카까지 찾아갔대. 그리고 한 달간 정말 밤낮 없이 일을 해야 했대. 사실 진짜 일을 하고 싶어 간 게 아니었잖아? 그런데 심장이란게 없는 친부는 정말 진지하게 각종 잡일과 사진촬영일들, 필름현상등을 오랜만에 본 아들한테 다 밀어준거야.드디어 돌아가는 날, 그는 아들에게 봉투를 건넸어. 봉투 안에는 1030 달러가 들어있었대. 차라리 1000 달려였다면 오히려 슬프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씁쓸하게 말했었어. 그때 드디어 느꼈대. 이 사람에게 나는 아들도 누구도 아니구나. 라고...그러면 이 미친 친부랑은 인연을 끊었어야지... 그런데도 또 이 모질지 못한 남자는 그러지 못했지. 그 이야기를 했을때도 시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그런 인간을 아비로 두게 해 미안하다 했대...  

그 엘에이 방문건 이후로 또 몇 년간 그들은 서로 존재하지 않는 듯 살았어. 그러다가 남편이 대학을 다니면서 시어머니가 소개한 방송국 일을 하는 중이었어. 시어머니는 경력을 쌓아서 졸업하면 남편이 프로듀서가 되었으면 했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여기도 방송국은 끈기있게 바닥부터 해서 위로 올라가는게 정석이야. 그런데 미친 시부가 어느날 웬일로 아들을 찾아와. 시어머니 몰래... 이 미친 인간은 야망이 커서 다국적 포토 에이전시를 만드는게 목표였는데 프랑스, 미국, 남미에 이어서 영국에 에이전시를 열게 된거야. 손오공도 아니고 여기저기 다 있을 수 없으니까 믿을만한 인간을 런던에 심어두어야 했던거지. 그게 남편. 백날 천날 머슴같이 일해야 하는 방송국 말고 런던 가서 포토그래퍼 하라고 꼬심. 대학은 뭐하러 다니냐. 포토그래퍼는 그런 거 필요없다. 이 남자는 안그래도 사진 찍고 싶던차에..  

나도 이제 성인이다. 마음대로 때려치고 런던 감. 시어머니 극대노... 둘이 한동안 인연 끊었음. 철딱서니 남편은 런던 가서 일하기 시작했어. 포토에이전시에서 취재한 사진들을 돈 더 내는 미디어들이 사가서 보도하는 식이야. 이 남자는 왕실 전문 포토그래퍼여서 죽은 여왕이나 지금 대단히 칭송받는 케이트, 윌리엄 이런 사람들이 별 볼일 없을 때 사진들도 많이 찍고, 레드카펫 공식행사, 때로는 시아버지가 시키는 셀럽 프라이빗 포토슛 등을 많이 했어. 돈도 꽤 버니까 학교로 다시 돌아가거나 다시 방송국 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대.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라하는 엄마 말 안 들음...그러다가 갑자기 시동생이 어느 밤에 전화해서 쌍욕을 하면서 당장 스위스로 튀어오라 함. 시어머니 암 말기였음...시동생은 인생을 중단하고 시어머니 옆에서 임종까지 계속 함께 했고 이 남자는 그렇게까지는 못함. 걸려 있는 일이 많아서 자주 왔다갔다하며 엄마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대.


우울증 남자가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있으므로 응대를 좀 해주고 돌아와야겠어. 가기전 내가 제일 많이 울었던 이야기 하나 남기고 갈게...우리 시어머니 너무 너무 상레이디라 운동화 딱 한 켤레 있었는데 그나마도 거의 신은 적이 없대. 그런데 단 한 번 그 운동화를 야무지게 쪼여매서 신고 미친듯이 달린적이 있어. 남편이 초등학교때 집에 오질 않아서... 남편은 어머니 날 선물로 학교에서 빈계란 껍데기로 무슨 공예를 해서 조심조심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그들은 파리 외곽 숲이 우거진 예쁜 동네에 살았고 하나 위험할 것도 없고 그냥 학교까지 걸어다니는 그런 생활) 오다가 돌부리에 넘어져서 그 소중한 선물이 다 깨진거야. 그래서 울고 있었대. 올 시간에 안 오니까 어머니는 미친듯이 뛰어서 온 동네를 뒤지고 자전거도 타고... 그러다가 냇가 근처에서 울고 있는 아들을 발견했어. 계란은 꺠졌어도 네 마음은 안 깨졌으니 되었다 했대. 그때 턱의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 그에겐...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진짜 현실적인 신데렐라라고 생각해. 생각해 보면... 틴에이저 180넘는 아들 둘, 전 남편 유렵에선 모르는 인간 없는 유명인, 시댁 완전 실세... 그런데도 더 좋은 남자를 만났잖아.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 이상은 대접 받을 수 없을 만큼 사랑받았다고 본인도 다이어리에 남겼을 정도야.이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 여인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그녀는 자궁암으로 생을 마감하게 돼... 나는 그녀가 얼마나 좋은 엄마였나를 구구절절히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 철 없던 아들들이 얼마나 엄마라면 끔뻑 죽었는지를 보면 된다고 생각하거든. 내 남편은 아직도 엄마 이름만 나와도 눈물이 고이고 내 시동생은 남편보다 더했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웃기고 시크한 여자라고 기억해. 둘다...그렇지만... 시어머니 장례식에서 그 형제 둘은 멱살잡이에 서로 피를 볼 정도로 몸싸움을 해. 난 그것도... 너무 짠했어. 


남편과 시동생은 성향이 너무 다르고, 항상 남편은 좋아하는 여자를 시동생에게 뻇기는 입장이었다 해도, 정말 어떤 친구보다 깊은 사이였어. 늘 그는 그렇게 말했거든. 그 어둡던 시기에도 나는 내 동생과 베란다에 앉아 엄마의 차 헤드라이트를 기다리면서 시덥잖은 농담으로 낄낄댔다고...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이 제일 재밌었다고... 사람이 슬프거나 우울하면 항상 침울할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아. 우리는 어떻게든 살고 싶거든. 그 와중에도 우리는 억지로라도 웃고 있어. 장례식장에서 웃듯이... 그들은 정신적으로 친부를 장례시킨 그 이혼 기간에 둘이서만 재미있었다고 하더라고.그런데... 시어머니 장례식장에선 그렇지 않았지. 시동생은 마지막 가는 길에 같이 하지 않았던 형을 정말 심하게 비난했어. 형은 어쩌면 엄마의 암의 원인일지도 모르는 그 친부의 일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남편은 남편대로 억울했어. 좋게 보내드려야 할 장례식장은 형제의 멍과 피로 물들었어. 


시동생은 의대를 중단했어. 시어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2년을 꼬박 그렇게 같이 멈춰 있었고, 같이 했으면 했던 형은 그러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들었나봐. 남편은 런던에서 한참 뜨는 신예 포토그래퍼였는데 그는 그걸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해. 난 어느 쪽도 옳고 그름은 없다고 생각해. 그건 각자의 결정이지 누가 판단할 건 아니잖아. 그냥 난 인간적으로 남편이 시아버지 에이전시를 키운게 시동생의 심기를 거스렸다고 생각할 뿐이야. 장례식장에서 주먹다짐을 한 형제는 몇 년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어. 그게 서로 아프지도 않았다고 해. 엄마는... 절대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수도 없는 존재잖아.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히 그녀를 사랑했으니까.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엄마니까 나도... 내 시동생이 더 가까웠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해. 떠나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끝까지 손 잡아주고 있던 자식이 어떻게 안 소중해. 당신이 너무 소중하다고 매순간 울어주던 자식을...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에 유언장을 고친 것을 나는 이해해. 큰 것들을 두고 조금 사소한 것들을 모두 그녀는 고쳤어. 그리고 그 사소하지만 정서적으로 중요한 모든 것은 우리 시동생이 간직하게 되었어. 그리고... 난 그것도 사랑이라 생각해. 시동생은 한참동안 그걸 형한테 비밀로 했어.장례식 후, 거의 남편이 나와 결혼할 즈음에야 그들은 다시 형제로 연락을 하며 지내게 돼. 나는 시동생을 만나기 전, 이미 전화통화를 몇 번 했어. 목소리가 매력적이란게 뭔지 잘 몰랐는데 그게 어떤건지 알게 되었고, 프랑스어도, 이태리어도, 영어도, 스페인어도 너무 유창하고 말을 조금 느리게 하는 매력적인 남자였어.처음에 그가 했던 말은 ... 그래. 형이 엄마같은 여자를 찾았다고 했지만 그 말 조차 자기는 기분이 나쁘다고 했어. 엄마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한참 지나서 딱 한 번 그렇게 지나가듯 말했어. 엄마 같은... 아니 엄마랑 정말 닮은 사람이라고... 살면서 들어본 제일 좋은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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